대한불교조계종 호압사 > 서울특별시 Seoul,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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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호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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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금천구 호암로 278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234

278, Hoam-ro, Geumcheon-gu, Seoul

전통사찰

hoap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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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도읍으로 삼는 것을 방해하던 호랑이 괴물을 잡기위해 지은 호압사(虎壓寺)
금천구에서 유일한 전통사찰로서 1393년(조선태조 2년) 무학대사가 창건하였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8호 석약사불좌상이 있다.
호압사는 태조가 조선을 세우고 궁궐을 지을 때 일이 진척되지 않고 여러 차례 궁궐이 무너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반은 호랑이고 반은 모양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건물을 들이 받으려하여 군사들이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으나 괴물은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실로 들었을 때 노인이 나타나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다하며 호랑이 기를 누르기 위해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롭다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석약사불좌상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서 호압사 약사전 내에 있다.
이 석조불상의 육계는 낮고 나발의 머리칼은 촘촘하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넓은 사각형으로 다소 양감이 표현되었다.
체구의 표현과 왼팔의 옷주름, 가슴의 띠매듭 등은 조선 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상체는 단정하며 두 손은 앞에 모아 약호(보주)를 얹었는데 이를 통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sajyaguru)는 중생의 질병 치료, 수명 연장, 재화 소멸, 의식(衣食) 만족을 이루어 주며,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부처님(여래)을 말한다.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는 지금의 시흥군의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 하고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1394년(태조 3)을 전후해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즉 태조가 서울에 궁궐을 세울 때 전국의 장인을 모아 진행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밤만 되면 무너져버려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는데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이 괴물은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며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호랑이 모습을 한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虎壓寺)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설화는 공통적으로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찰설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의 모양을 호랑이로 본 것이며, 이를 누르기 위해 절을 창건했다는 이야기이다.

호압사의 창건기록으로는 호압사의 본사였던 봉은사에서 엮은 '봉은사 말사지'에서 볼 수 있는데 1407년인 조선태종7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며 또한 태종임금이 호압이란 현액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있습니다. 그러나 1394년(태조 3)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관청을 두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 궁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호압사는『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의 기록보다는 태조 2년이나 3년 무렵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호압사의 역사는 이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세기에 전국 사찰의 위치와 연혁 등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나 가람고(伽藍攷)에도 호암사(虎巖寺) 또는 호갑사(虎岬寺)라 하여 간략하게 나올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에 이르러 중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의민(義旻) 스님 쓴 「경기좌도시흥삼성산호압사법당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 의하면 이 해에 당우가 퇴락한 것을 당시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스님으로 속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계월헌(溪月軒)이다. 삼기(지금의 합천) 출생으로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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