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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5교구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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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

405, Beopjusa-ro, Songnisan-myeon, Boeun-gun, Chungcheongbuk-do

전통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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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다. 의신이 인도에서 공부를 마친 후 신라로 돌아오는 길에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돌아 왔는데, 절을 지을 터를 찾아 다니던 중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우는 것을 보았다. 의신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산세를 보니 아름다운 절경에 비범한 기운이 서려 그 곳에 절을 지었다 한다. 이에 절 이름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젼, 즉 부처님의 가르 침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지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이 주석하면서 여러차례 중창이 거듭되었다. 문종의 다섯 째 왕자였던 도생 승통(고려 교정에서 가장 높은 법계의 지위)이 절의 를 지냈으며, 원종 때는 자정 미수대사가 주석 했는데 왕명으로 각종 경전과 장소 92권을 찬술하기도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 사리탑은 지금 증인전 뒤쪽에 남아있다. 조선 초 세조 때는 신미대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 조선 중기에는 60여동의 전각과 70여개의 암자를 지닌 대찰이 되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부분적으로 중 수를 계속했으나 정유재란을 맞아 또다시 전소되었다. 이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유정이 팔상전을 중건했고, 벽암 각성이 절을 중창했다. 또한 1939년에 미륵불상을 조성을 시작하여 한 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했고 1967년에는 전각을 중수하였다. 1990년 청동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고 그 대좌의 지하에 용화전과 성보전시관을 마련하였다.


법주사에는 국보 제55호 팔상전과 보물 제915호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보물 제916호 원통보전, 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 국보 제64호 석련지, 보물 제15호 사천왕석등, 보물 제216호 마애여래의상, 모물 제848호 신법천문 도병풍, 보물 제1259호 괘물탱, 보물 제1360호 소조삼불좌상, 보물 제1361호 목조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413호 철확, 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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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세월의 발자취 고스란히 간직한 오늘날 이 땅에 미륵 신앙의 요람.


법주사의 창건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 율사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보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진표 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 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습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현재의 법주사는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습니다.


법주사의 중창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법주사라 이름 붙여진 이후 법주사는 성덕왕 19년(720)에 중건되었으며 고려에 와서는 태조 1년(918)에 왕사(王師)인 증통 국사(證通國師)가 중건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종 때에는 여섯째 왕자인 도생 승통(導生僧統)이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와 산내 암자가 모두 소실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으나 인조 4년(1626)에 벽암 각성(碧岩覺性)선사가 나와 중창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벽암 선사는 보은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며 그 후 1624년부터 3년 동안 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법주사 사적'이 최초로 쓰인 것은 1630년인데, 여기에 임진왜란 이전 조선 초기에 있었던 건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소가 기록되어 웅장한 규모였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 가운데 예불용 전각 등 중요 건물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웅대광명전 (2층 28칸). 산호보광명전 (2층 35칸), 팔상오층전 (36칸), 비로전 (17칸), 약사전, 극락전 (6칸), 원통전 (6칸), 지장전, 연경전, 영산전, 도솔전, 응진전, 대양문 (7칸), 천왕문, 조계문, 해탈문, 동행랑, 서행랑

임진왜란 이후 벽암 선사의 일대 중창에도 불구하고 복구된 건물의 수는 20여 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고려시대의 법주사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여러 차례 중창이 거듭되었습니다.

먼저 문종(1046~1083)의 다섯 째 왕자였던 도생 승통(導生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다.

문종의 넷째, 다섯째 아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과 혜덕왕사 소현은 도생 스님의 형이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국교라고 할 만큼 국광과 백성들의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왕실에서는 왕자가 출가할 경우 이를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 들였고, 특히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킬 만큼 신심이 돈독하였습니다.

도생 스님의 행장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해덕 왕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던 사실은 스님이 곧 법상종 승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스님이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다는 것은 절이 신라 이래의 법상종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사실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종 때(1122~1146)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俗離寺占찰法會疏)], 1342년(충혜왕3)의 [고려국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高麗國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銘)], 그리고 도생승통비(導生僧統碑) 등입니다.

이를 통해 먼저 인종 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은 속리사로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의 소문을 지을 만큼 사격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종 때(1259∼1274)는 자정 미수(慈淨彌授, 1240∼1327) 대사가 절에 주석하였습니다.

스님은 고려 중기의 유명한 법상종 승려였습니다. 일찍이 13세에 출가한 이래 법주사를 비롯해서 장의사(莊義寺)국령사(國寧寺)대민천사(大旻天寺)동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습니다.

법주사에 있을 때는 왕명으로 각종의 경전과 장소(章疏)를 92권이나 찬술하였습니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습니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법주사


조선시대 들어서도 절의 법등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흔히 조선시대가 숭유억불의 시대라 하지만 유교는 치국(治國)의 원리와 개인적 수양의 방편일 따름이고, 사람들의 불교신앙은 사실 상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초 세조 때(1455∼1468)는 신미(信眉) 대사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하였습니다.

세조의 스승으로서 큰 존경을 받았던 신미 스님은 이보다 앞선 1449년(세종 31) 12월에 속리산 내의 복천사(福泉寺)를 중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복천사중수보권문]이 전합니다.

조선 중기 절은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습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중수를 계속했으나 정유재란을 맞아 또다시 절이 전부 불타버렸습니다. 전쟁 뒤에는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사명(四溟) 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습니다.

1624년 다시 중수가 시작되어 이듬해 불사를 마치고 [법주사사적기]를 편찬하였습니다.

그 뒤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습니다.

벽암 스님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였던 서산(西山) 대사에 버금가는 분입니다.

병자호란을 맞아 구국의 일념으로 의승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입니다. 1851년(철종 2) 3월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872년(고종 9)에는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렸습니다.


오늘날의 법주사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지 장석상(張石箱) 스님이 발원하고 전라북도 태인에 살던 김수곤(金水坤) 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金復鎭)이 요절하면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1967년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이 기울고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였습니다.

당시 금오 스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정열적으로 가람을 일궈나가면서 법주사의 선풍을 진작시켰습니다.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가람의 전각 대부분을 보수하고 복원하였습니다.

1975년 현대불교의 산증인이었던 금오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습니다.

1976년 주지 탄성(呑星) 스님이 대웅보전을 보수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습니다.

1990년 주지 월탄(月誕) 스님의 원력으로 청동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그 좌대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마련하였습니다.

1997년 선원과 후원 불사가 완료되어 현대적 시설을 잘 갖춘 환경에서 정진하는 대중을 외호하고 있으며, 2002년 청동미륵대불을 과거 진표율사계서 금동미륵대불을 모셨다는 기록에 의거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게 됩니다.

2005년 현재 4년간의 해체, 복원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이 예전의 위용을 되찾으며 속리산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법주사는 신라시대에 처음 법등을 밝혀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를 절 안팎의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잇고있는 오늘날 이 땅에 미륵 신앙의 요람이라고 일컬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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