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1교구 불국사 > 경상북도 Gyeongsangbuk-do, 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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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1교구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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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385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15-1 불국사

385, Bulguk-ro, Gyeongju-si, Gyeongsangbuk-do

전통사찰

bulguksa9913@hanmail.net, bulguksa@templest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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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입장)시간

주중  오전 9시~ 오후 5시 30분       
주말 및 공휴일  오전 8시~오후 5시 30분
매표마감 5시 30분, 퇴장시간 6시 30분. 연중무휴. 반려동물 입장 불가




















 


809년(헌덕왕 1)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로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 이 절은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다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을 짓고 신림ㆍ표훈 등 의상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하다. 이들 기사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목숨을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뒤 국가에서 완성시켰 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큰 건물로는 오백성중전ㆍ천불전 등이 있고, 이 두개의 건물만큼 크지는 않아도 중요한 건물로는 시왕전ㆍ십륙응진전ㆍ문수전 등이 있다

또한 승방이라고 생각되는 동당ㆍ서당ㆍ동별실ㆍ서별실ㆍ청풍료ㆍ명월료ㆍ객실ㆍ영빈료 등이 있었으며, 그밖에 누ㆍ각ㆍ문ㆍ고ㆍ욕실 등이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887년(진성여왕 1)과 1024년(현종 15)에는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고, 1172년(명종 2)에는 비로전과 극락전의 기와를 갈았으며, 1312년(충선왕 4)에도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다. 1436년 (세종 18)에는 대웅전과 관음전과 자하문을 중수하였고, 1470년(성종 1)에는 관음전을, 1490년에는 대웅전과 각 절을 중수하였으며, 1514년(중종 9)에는 극락전의 벽화를, 1564년(명종 19)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에 와 있었던 담화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ㆍ극락전ㆍ자하문 기타 2천여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인조 8)에는 태호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효종 10) 천심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밖에 안양문ㆍ극락전ㆍ비로전ㆍ관음전ㆍ나한전ㆍ시왕전ㆍ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뒤 또다시 퇴락되어가 던 이 절은 대통령 박정희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ㆍ 관음전ㆍ비로전ㆍ경루ㆍ회랑 등은 이때 복원하였고 대웅전ㆍ극락전ㆍ범영루ㆍ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The Bulguksa was built in 528, the year after Buddhism was officially accepted by the Silla Dynasty in the reign of King Beopheung. In order fulfil the wishes of his mother, Lady Yeongje and his wife, Queen Gi Yun, he built a temple with the names Beopryusa or Bulguksa. Later, in 574, the temple was rebuilt by the Lady Jiso who was the mother of King Jinheung, and it is recorded that statues of Vairocana Buddha and Amita buddha were added at this time.

In 670, the Museoljeon was constructed and in 681 statue of Sakuamuni Buddha. In 751, Minister Kim Daesung started rebuilding. However, he died in 774 before completing the reconstruction. The government took over and completed Bulguksa as a great temple(according to Samguk yusa, a book on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The grounds of the temple were divided into five sections: the Daeungjeon, Geungnakjeon, Birojeon, Gwaneumjeon, and Jijangjeon areas. In addition, there were about 100 Other buildings and facilities. The entire complex went through several remodeling until eventually most of it was burned to ashes by Japanese pirate invaders. In 1612, the right and left walkways, a bell tower, and the southern quarter were rebuilt. By the middle of 1700 the east and west quarters, the central quarter, and the original layout was nearly restored. From 1963 to 1973, the Mooseoljeon, Gwaneumjeon, Birojeon, and walkways and corridors were rebuilt and the Daeungjeon, Beomyeongru, Jahamun and stone platforms were restored to their present appearence. In 1995, Bulguksa was designated a world cultural heritage site along with Seokguram by UNESCO. Bulguksa has about 1,400 year of history and it has been an important Buddhist seminary in Korea. Many venerable monks such as Euisang, Shinrim, Pyohun, Daehyun, Haeweon, Buseol, Damhwa, Haean, Taeho, Haejong, Taein, and Weolsan in this temple as head monks.

新罗佛教被公认为国教的第二年, 即公元528年, 佛国寺由法兴王的母亲迎帝夫人和王妃己尹夫人所创建,最初寺名为法流寺。公元574年, 真兴王的母亲只召夫人重建该寺, 并安放了毗卢舍那佛和阿弥陀佛佛像。公元670年创建了无说殿,公元681年完成了大雄殿的释迦牟尼佛佛像。 公元750年左右由宰相金大城再次着手重建,直到公元774年由国家出资才告修建完工,由此形成了大伽蓝。寺院的布局以大雄殿为中心,大致分为极乐殿、毗卢殿、 观音殿、 地藏殿等5个部分。据传说,寺院除此以外还包括多达100余所的附属建筑。

但因为倭寇的人侵,绝大部分建筑被烧毁殆尽,唯有金铜佛像和石造物幸免于难。1612年左右佛国寺开始复原经楼、梵钟阁、南行廊等建筑.直至1700年代中叶,总算恢复了伽蓝的原貌。由于佛国寺日渐衰退,寺院逐渐失去了原来的风貌。因此,从1969年到1973年间又在旧址上重建了无说殿、观音殿、毗卢殿、经楼、回廊等建筑,并重修了大雄殿、泛影楼、紫霞冂、石坛等。1995年佛国寺与石窟庵同时被指定为世界文化遗产。具有1400多年历史的佛国寺曾有义湘、神琳 表训、大贤、海儷、浮雪、昙华、海眼、泰湖、海净、太仁、月山等历代高僧居此弘扬佛法,以至成了韩国佛教的重点道场。

仏国寺は新羅で仏教が公認された翌年の528年に、法興王の母・迎帝夫人と王妃・己尹夫人により、 法流寺と言う名で創建された。その後、574年に真興王の母・只召夫人によって最初の増改築工事が行われて、 毘盧遮那仏と阿弥陀仏の二体を安置したと言う記録が残っている。また、670年には無説殿が建てられ、681年には大雄殿の釈迦牟尼仏を完成した。751年には宰相金大城によって二回目の増改築工事が開始されたが彼が774年に死去した後、国家の手で大伽藍を構えることに至った。

伽藍褪置は大きく分けて大雄般、極楽殿、毘盧殿、観音殿、地蔵般で五つの区域から成り、本堂をはじめ百余りの付属建物や施設があったと言う。しかし、1593年壬辰倭乱(文禄の役)の時、大部分が戦火に遭って焼失した。兵禍を免れたのは金鋼仏と石造物だけであった。1612に年には左右の経楼、鐘閣、 南の行廊などが復旧された。1700年代の中ごろまでに再建され、ようやく伽藍らしさを取り戻すに至った。その後、朝鮮政府が排仏政策をとったために仏国寺は衰退し、昔日の偉容を失った。仏国寺が今日のような姿になったのは、1969年から1973年にかけての復元大普請の成果である。そして1995年、石窟庵とともにユネスコの世界文化遺産に指定された。1400年余りの長い歴史をもつ仏国寺は、義湘をはじめ、神琳、表訓、大賢、海円、浮雲、雲華、海眼、泰湖、海浄、太仁、月山ら禅教の高僧大徳が掛塔して韓国仏教の根本道場としての面目を施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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