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2교구 해인사 > 경상남도 Gyeongsangnam-do,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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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2교구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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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122, Haeinsa-gil, Gaya-myeon, Hapcheon-gun, Gyeongsangnam-do

전통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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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의 화엄10찰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창건하였다. 신림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목태후가 불사를 도와 전지 2,500결을 하사하였다. 갑자기 순응이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이었 던 의랑이 이곳에서 화엄의 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 중에 화엄의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 등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뒤 세조는 장경각을 확장학 개수하였으며,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와 인혜왕비가 학조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실화하여 여러 요사와 만월당ㆍ 원음루가 불탔고,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이 불타버리자 뇌음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실화하여 큰 축대 아래 수백칸이 불타버렸지만,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상성의 도움으로 능운 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화하였으나, 관찰사 김상철의 협조로 설파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의 도움으로 영월ㆍ연월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가 다시 실화되었다.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왔다. 조선시대의 불교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 18개의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를 전국의 수사찰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을 두었을 때 이 절은 영남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1본산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현재는 말사 75개와 부속암자 14개를 거느리고 있으며, 대법보사찰로서 선원ㆍ강원ㆍ율원 등을 갖춘 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ㆍ삼성각ㆍ응진전ㆍ조사전 ㆍ퇴설당ㆍ응향각ㆍ관음전ㆍ궁현당ㆍ구광루ㆍ경학원ㆍ명월당ㆍ사운당ㆍ해탈문ㆍ국사단ㆍ봉황문ㆍ일주문 등이 있고,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과 국보 제53호인 장경각, 보물 제264호인 석조여래좌 상,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원경대사비, 사간장경 중의 보물 다수 등이 있다. 이 중 대적광전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중심법당이다. 창건 이후 건물의 내력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현 건물은 1817년(순조 17) 제월과 성안이 건립한 것이다. 내부에 봉안된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상ㆍ보현보살상은 본래 성주군 금당사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이 절이 폐사될 때에 용기사로 옮겨졌다가 1897년 범운에 의하 여 현재의 위치에 봉안되었으며, 원래부터 있던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ㆍ지장보살ㆍ보현보살도 함께 봉암되어 있다.

장격각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기본 정신을 대변해주는 건물이다. 민족의 지보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둔 2개의 판전으로서, 경판의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은 건물이다. 명부전은 지장전이 라고도 하며, 목조지장보살 및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9평으로 1873년(고종 10)에 담화대사가 옛금찹전 자리에 신축하고, 경상남도 웅천의 성흥사에서 옮겨온 시왕상을 봉안하였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 며, 소조 석가여래 및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23평으로 본래는 해행당이며, 1488년(성종 19) 학조대사가 초창하여 역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현건물은 1817년 성안대사가 중건하였고, 내부의 나한 상은 1918년 판전 서재에서 옮겨 봉안하였다. 응향각은 노전이라도 하며 크기는 74평으로 1936년에 고경이 건립하고, 현재는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퇴설당은 70평으로 1817년 제월대사가 건립하였고, 현재 선원으로 쓰이고 있다. 행해당은 조사전이라고도 하며 순응ㆍ이정 등 50여 조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4평으로 1899년 범운대사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본래는 희랑조사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보장전으로 이안 되었다. 심검전은 관음전이라고도 하며,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3동 80칸으로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현건물은 1908년 회광이 천상궁의 시주로 중건하였으며, 현재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궁현당에는 관세 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3동 80칸으로 1407년 학조대사가 중건하였고, 1963년 해붕이 삼창하였으며, 1908년 회광이 관음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현재는 불교전문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학원은 경홍전이라고도 하며 크기는 34칸이다. 1892년 민형탁의 뜻에 의하여 범운대사가 건립하였다. 처음 왕ㆍ왕후ㆍ태자의 삼전위축소로 건립되어 경홍전이라 불렸다. 구광 루는 크기는 67평으로 1818년 감사 김이재의 주선으로 건립되었다. 본래는 재식시 법요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중의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쪽 한칸은 종고루로 사용되었다. 명월당은 크기는 146평 으로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현건물은 1940년 설호대사가 중건하였다. 예전에는 승정을 행하였고, 지금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해탈문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817년 중건하였고, 1899년 범운대사가, 1940년 사중에 서 중수하였다. 국사단은 6평으로 현건물은 1855년에 건립, 1899년 범운대사가 중수하여 국내를 맡은 신을 안치하였다. 봉황문은 1817년 건립하였으며, 사천왕탱이 안치되어 있다. 일주문은 1940년에 건립되었다.

그밖의 해인사의 성보로는 정중탑ㆍ묘길상탑ㆍ가야산 석불ㆍ원경왕사비ㆍ오백나한도ㆍ금은자사경ㆍ희랑조사상ㆍ세조영정ㆍ상탑향로ㆍ무공수정ㆍ옥등잔ㆍ진주등ㆍ순은화병ㆍ관욕소관ㆍ오동향로ㆍ순은다기ㆍ순은 향료ㆍ순은방향로ㆍ향로개ㆍ요령ㆍ감로병ㆍ일영의ㆍ봉촉대ㆍ귀형촉대ㆍ관복ㆍ오조어필첩ㆍ법라ㆍ옥제조화ㆍ금강저ㆍ각사인ㆍ헌종어필ㆍ삼보인ㆍ계첩석판ㆍ팔상병ㆍ33조사영병ㆍ복수수병ㆍ숙종어필ㆍ화초수병ㆍ화조오채병ㆍ흑판복수병ㆍ복수채병ㆍ대화로ㆍ금산첩ㆍ방울ㆍ대종ㆍ소종ㆍ경허친필ㆍ명문와ㆍ향합 등이 있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 는 사명대사ㆍ선수ㆍ희언ㆍ각성 등이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맥을 따질 때,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ㆍ희랑 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의 천ㆍ경남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학조ㆍ체정ㆍ유기ㆍ유일ㆍ상언ㆍ유안ㆍ성여 등 유명한 승려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또한, 역대 명인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다른 사찰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점이다. 말년에 가야산에 들어와 생애를 마친 최치원이라든가 대장경 조성에 있어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 김정희, 그리고 홍길동으로 알려져 있는 정인홍 등은 모두 이 절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산내 암자중 유서가 깊거 나 규모가 큰 것은 신라왕실의 원찰로 전해지는 원다암을 비롯하여, 백련암ㆍ지족암ㆍ희랑대ㆍ국일암ㆍ약수암ㆍ용탑암ㆍ삼선암ㆍ금선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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