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태고종 탑사 > 전라북도 Jeollabuk-do, 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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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한국불교태고종 탑사

063-433-0012

FAX : 063-432-0072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367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8

367, Maisannam-ro, Maryeong-myeon, Jinan-gun, Jeollabuk-do

전통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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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시간 : 09시 ~ 18시
주차정보 : 마이산 남부 주차장 이용
부대시설 : 화장실, 외국어, 한국어, 관광안내소


수박크기의 돌덩이에서 부터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얹어 크고 작은 외줄 돌탑을 80여개  쌓아 만든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 마이산 탑사(馬耳山塔寺).

높이 15m, 둘레 20여m의 거대한 돌탑도 즐비하다.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고하게버티고 서있는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보기드문 불가사의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신비로운 얘기는 1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이다. 수행을 위해 25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이처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던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상단부분에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쌍의  탑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백여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것은 정녕 부처님만이  아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이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탑사에는 또하나의 신비가 있다.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른다.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온다.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없다.
 
마이산 탑사아래로 500m 지점에 위치한 관광지가 있으니 이것이   탑영제 벗꽃길이다. 이곳엔 봄마다 저수지를 따라 벗꽃길이 펼쳐지는데, 본래 관광풍치 조성을 위해 축조 되었다. 이곳에도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드린 후 영험을 받았다고 한다.
 
탑영제에서 탑사를 올려다보면 산에 가리워져 탑은 보이지 않지만 암마이봉과 나도산 봉두굴이 유연한 자태로 탑영제 수면을 비추고 있다. 이곳은 큰 가뭄이 들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방생의 최적지로 꼽힌다.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혜명스님은 바로 이갑룡 처사님의 3대손이다. 혜명스님위로 2대손인 도생 처사님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지금은 혜명스님과 4대손인 진성스님이 함께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다.
 
스님은 처음엔 신비감과 호기심에 관광차원으로 찾은 사람들을 부처님과 연을 맺어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포교라 강조하면서 "마이산 탑사를 찾는 많은 불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불교의 연을 잇는 관광 사찰로 더욱 발전시키겠다."며 "이제 불교는 산중불교에서 대중불교로 활성화 되어야 한다. "고 설명하면서 조용한 미소를 짓는다.
 
또, 4대손인 진성스님과 함께 3억원을 투입, 미륵당 앞에 나한전을 짓고 종각, 요사채, 화장실 설치는 물론 주위 조경과 사찰 환경정화 사업을 사업을 완공 하였다. 혜명스님은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마이산 탑사문화재관리소장, 진안경찰서 치안행정자문위원회 회장, 진안 애향운동본부 본부장 등(진안애향본부장 및 마이산탑사 갑룡장학회를 10여년동안 운영하고 있으며 곧 장학재단도 설립중이며) 10여개가 넘는 사회사업직책을 가지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적인 스님상구현을 위해서는 생활에 뛰어들어 봉사활동 등 사회활동을 통해 포교를 하고 또 지역민과 한데 어울어져 지역발전에도 한몫을 담당하는게 제 나름대로의  생각입니다."며 사회활동에 대해 설명하는 혜명스님.
 
스님의 이와같은 희망찬 포교의지에서 우리가 그려본 내일의 밑그림은 밝다. 1년에 약 1백 20여만명이 넘게 찾아오는 마이산 탑사에서 그 만큼의 사람들이 불자로 거듭날 때 불국토는 앞당겨질 것을 믿는다.


마이산탑사의 역대 인물사


제1대 탑의 축조자 이갑룡
본명: 경의
호: 석정
1860~1957 전북 임실 태생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손
25세때 마이산에 입산하여 수도중 중생의 죄업을 씻고자 고행탑, 중생탑을 축조(1886~1928)
저서: 신서30여권

제2대 이도생
본명: 기동
호: (쌍암)
1912~1985 전북 진안 마이산탑사 태생
전주이씨 효령대군 17대손
부친의 업적을 지키고 난항을 견디어 지금의 탑사를 이루는데 크게 공헌함.
저서: 쌍암집

제3대 이혜명
본명: 왕선
호: (원암)
전북 진안 마이산탑사 태생
전주이씨 효령대군 18대손
득도: 1971년 신벽산큰스님으로부터 출가
직책: 현 마이산탑사 조실
저서: 전북사찰록집, 한국 불가사의 마이산탑사 등 다수
포상: 문화부장관상, 검찰총장상, 총무원장상등 감사패 및 공로패, 30여개

제4대 이진성
본명: 재동
호: (도암)
전북 진안 마이산탑사 태생
전주이씨 효령대군 19대손
득도: 1985년 신벽산큰스님으로부터 출가
직책: 현 마이산탑사 주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는 않는 신비한 돌탑


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10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탑들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에는 유난히 세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 오고 있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만,이곳의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뿐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런 접착물 없이 서로 맞닿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돌탑의 축조비법은 무엇이고 100년 풍상을 견뎌낸 돌탑의 신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낮에는 돌을 날으고 밤(자시)마다 하루 한 개씩 정성으로 올렸고, 음에 날에는 양에 돌을 올리고 양에 날에는 음에 돌을 올렸다. 또한 탑을 쌓기 위해 자리를 잡고, 다음 올라갈 음,양돌을 앞에 놓고 좌선을 하면서 천기를 받아 지기를 올리고 온 몸에 기를 넣어 자시에 정확히 단번에 올려 작은 돌맹이로 고정시킨다.

탑을 쌓은 것은 2가지 방식이 있는데 피라밋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고 그속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은것이다. 또한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리는데는 100일의 정성의 기도 후 올렸고 피라밋 상단부분에는 잔돌로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우물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음양돌을 올렸다 한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이갑룡의 진법과 기공법등 축지법의 힘이 사용되었다 한다 , 이갑룡 처사는 축지법을 39살부터 터득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가볍고 사픈이 다니는등 아무리 무거운 돌도 으흑음! 하고 소리를 내면 겉든 이 돌을 들어 올렸다 한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갑룡처사는 매일 다람쥐 바뀌돌 듯 돌만 들고 다니거나 산속에서 혼자 앉아있거나 암,수 마이산을 오르내리고 암 마이봉과 수 마이봉에 강목천을 묶어 놓고 건너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본 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주를 단숨에 갔다 왔다하는데 당시 진안경찰서장이 찾아와 면담을 하고 전주에 갔는데 벌써 이갑룡은 전주에서 볼일을 다 보고 진안으로 오는 것을 보고 "아니 언제 전주에 오셨습니까?" 물으니 "당신이 나가고 나서 바로 출발해서 왔네" 하니 그 사람은 아니 놀랄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이갑룡의 축지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목격하고 이 탑을 쌓는데는 축지법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불의의 명작을 축조할 수 있겠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이 현상은 이갑룡 처사의 정신력이라 할수 있겠다.


이갑룡 도사의 행적
자 : 갑룡 호 : 석정   (본명: 이경의, 자: 갑룡, 호: 석정)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서당에 다니지 못 하고 창호지 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읽혔으며, 군불에 나무를 집히고 앉아서 나무 가락으로 땅바닥에 글을 쓰며 틈틈이 일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하셨다.  
 
아주 어릴 적에 갓 돌을 넘기시고 제삿날에 조상 제삿상에 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침묵과 함께 기도를 한참 동안 하셨다 한다.
 
남달리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같은 동내에서도 이경의를 이길 자가 없었다 한다.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한 갑룡은 부모님이 자리에 누워 임종하실 때 이갑룡은 자기의 손가락을 조금 잘라 피를 먹이시어 약 석 달간을 더 사시게 하셨다 한다.
 
16세 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모님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시다 삶과 죽음의 허무와 무상을 탄식하시다가 19세 때 시묘살이를 마치고 전국을 만행하시면서 속세를 떠나셨다 한다. "疊疊山中, 萬康漁萬來"라 오직 홀로의 산과의 대화요, 강을 건너도 또한 물고기와의 대화로다.
 
외로움을 달래며 이 산 저 산, 이 절, 저 절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결국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가실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갑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 해로 그는 젊음을 이곳에 묻으리라 결심하신다. 유, 불, 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에서 남자산이라는 지리산이 200리, 여자산이라는 계룡산이 200리 그 한복판의 마이령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1기, 2기, 쉬지 않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히 등진 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 층씩 30여 년 동안 쌓아 올렸다.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했다. 자연석을 탑촌으로 하나둘 올려놓으면서 뭇 중생이 지은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하였으며 나라를 잃은 아품을 하늘에 알리고 독립을 기원하면서 탑이 완성될 동안에 보통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령의 힘으로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더욱이 받침대(기둥) 하나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 하나 빌리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할 때 산하에 기도하고 돌아올 때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배낭에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석 석탑은 세계 조탑사에 비추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군을 축조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같은 형태로 원형의 기단부로부터 70도 정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뻗어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 때 쿠션 역할을 하고 자연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 올렸다 한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으로 역학적인 면에서 보다 자연석으로 조탑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에 경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탑의 신비와 가치는 그러한 축조 기술보다 하나하나의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미에서 오는 감동인데, 펑퍼진 기단부로부터 유연히 뻗어 오른 선의 미와 육중한 탑신의 중량감에서 탑봉의 예각이 주는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는 법열이다.

더군다나 돌로 이어지는 패턴은 절묘함과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은 탑의 배치는 단순한 가운데 다양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탑군은 저마다 입부리를 하늘을 향해 애절한 염원을 소원하는 듯하다.

자연석과 같은 암반으로 형성된 마이산의 산세를 이용하여 이 공간에 높고 낮으며 체감률이 뾰쪽한 탑과 원추형의 탑을 알맞게 조화시켜 황홀하게 구조한 배치의 솜씨는 범중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배열은 팔진도법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각각 다른 탑형은 음, 양의 이치를 살렸으며 높고 낮은 구조는 환생과 오행의 이치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신비의 전경을 이루게 했다.

이와 같은 조탑의 근본적인 원리보다는 갑룡의 천부적인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것이며 이러한 조형 의욕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고된 작업에서도 자기의 뜻이 공간속에 이루어져 가는 탑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조화 속에 도취되고 법설과 무아지경 속에 고달픔을 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후의 걸작을 남겼을 것이리라.

우리나라는 백제 때부터 석탑이 발달하여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이 축조되어 ‘탑탑응행(탑이 기러기처럼 줄서있다)’이라고까지 말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1300기의 탑이 쌓여져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라고 불렀으나 조선 중엽에 이르러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조탑이 자연 이루어지지 못 했다.

서양에서도 사원 탑 건조가 중단되어 오다가 철재로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질 때 마이산 일각에 백여 기의 탑군이 신비롭고도 화려하게 축조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통하여 근세에 조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마이산 탑과 같은 연대에 건조된 파리의 에펠탑을 들 수 있다.

이 두 탑을 대조해 보면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 대혁명의 백년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1889년에 8백만 프랑의 거액을 들여 300m 상공에 철재탑을 완성시켜 예술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고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석탑의 문화재로서의의 논문중에서......)

그러나 마이산 석탑은 단돈 백원의 예산도 없이 적수공권으로 이 만불탑을 이룬 것이다. 석정은 축조를 완성한 후에도 수도와 기도생활로 일관해 왔으며 영의 경지에 더욱 도달하여 60대에 불가사의의 신명글을 남겨 놓았다.

30여 권에 이르는 이 대부서는 밤에 기도하면서 영의 계시를 받아 쓴 것으로 이두어 한자 등 기본형에 필획이 가감된 형태의 보통 사람이 도저히 판독 불능의 문자로서 생전에 이 글을 밝히지 안 했으며 이 신명글은 영의 계시에 의한 통달한 사람이 나오면 이글을 알게 될 것이란 유언이 있었다.
참고로 말하면 석정은 세속의 문자와 접한 것이 적었고 그리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한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30여권의 신서를 남기었는지? 신서의 내용뿐 아니라 석정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기도하는 시간을 축내지 않으려고 무답무언으로 대답을 멀리 했다. 또한 소문을 듣고 제자 되기를 자원하여 찾아온 사람이 있어도 허락한 적이 없고 어쩌다가 다른 사람과 자리를 같이한 경우에도 도무지 말이 없었다 한다.

전주 관성묘에 가서 관성장군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마이산에서 힘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플 땐 항상 관성 장군상과 대화를 했다 한다.

어느날 은천리 누군가가 갑룡을 비판하고 다니고 탑사에서 그릇을 흠쳐 가면 그 괴로움을 관성 장군상에 물으니 ‘그놈을 내가 죽여주랴?’ 하고 물으니 갑룡은 그러지 말고 그냥 혼을 내주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해달라고 하자 그 다음 날부터는 그가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러자 자기가 갑룡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나니 병이 나아졌다고 한다.(전주 관성장군 성전 대표 대담)

갑룡은 유, 불, 선 선인으로써 통합 종교로써 일관했고 삶의 생활은 유교를 바탕으로, 수련은 도교를 바탕으로 기도는 불문을 바탕으로 경전에도 가까이 하셨다 한다.

40세 중반에 고금당 굴사에 기도 갔다가 어느 여인과 음양 합일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탑군에 와서 정화수를 뜨고 혼례식을 올렸다 한다. 그 후 자식 3형제를 두고 얼마 안 돼 최씨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다시 50후반부터 혼자서 살았다고 한다. 자식 3형제가 있었는데 이갑룡의 친형님이 종가집의 종손을 보지 못한다하여 적자생존법에 따라 장남을 형님에게 양자로 보내어 장손으로 대를 잊게 만들고 차남 이도생씨가 갑룡의 뒤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삼남은 장성해서 완주로 가 터를 잡고 후손을 내렸고, 차남인 이도생씨가 탑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옛 어른말로는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의 중턱에 강목천을 묻고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솟금령 영신합이라 글을 쓰고 천을 타곤 했다 한다. 낮에는 돌을 구분하면서 날랐고 밤 자시마다 하루에 한 층식 올렸다 한다.

천지탑과 같은 타원형 탑은 둥근 원형 나선형 방향으로 쌓아 올라가다 계단식으로 조금씩 튀어 나오게 하여 원형계단을 이용해서 오르고 내려왔고 상단부위에 잔돌을 70cm 높이로 차곡차곡 올려서 그 위에 널판 돌을 올렸다고 한다.
상단 부위는 잔돌 사이에 사각모양으로 나무를 대고 그 위에서 축지법으로 몸에 기공을 넣어서 몸을 가볍게 만들고 돌을 올렸다 한다. 맨 꼭대기 부처님 머릿돌을 올리기 위하여 백일 동안 기도하고 천신에게 기공으로 매달려 마지막 돌을 올렸다고 한다. 천지탑은 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탑이 완성되면 내려오면서 사각 우물 정자모양의 나뭇대를 철거하고 돌망치로 툭 튀어 나온 계단형 돌을 쳐서 들어가게 하면서 내려왔다고 한다.

천지탑은 음, 양으로 나누어지는데 보는 쪽에서 좌측이 음이고 우측이 양이다. 돌덩이 자체는 밑에부터 음으로 시작해서 위칸은 양이고 음양, 음양 순으로 이루어져 서로의 흡입력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상판의 널판돌은 음은 14기 양은 15기 음은 짝수이고 양은 홀수로 표현했다고 한다.

천지탑 앞에 오방탑을 세우고 오행을 상징하듯 우뚝 서 있다. 천지탑을 위해 지지하는 오방탑은 천지의 지, 수, 화, 풍, 사대와 자신의 몸체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탑 주변 일렬 신장탑들은 천지탑을 보호하는 신군장들로 33기의 장수의 탑이다. 천지탑을 보호하고 마귀의 칩입을 막기 위함이니 어느 마귀가 침입을 할 수 있겠는가.
천지탑 아래 갑룡의 처소를 잡고 기도실과 방사를 만들어 생활의 처소로 삼았다. 대웅전 아래 용궁이 있고 앞에 중앙탑(일명:흔들탑) 있는데 일자 신장으로 탑사의 정중앙에서 기준을 삼고 있다고 한다. 바람에 흔들거려도 꿋꿋하게 넘어지지 않고 잘 흔들린다고 해서 별명이 흔들탑이다.

일렬 중앙탑에도 작은 신장탑들이 보호하고 있고 꼭 하늘을 치솟아 오를듯한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우측에는 내공단 외공단이 있고 작은 용궁단이 바로 밑에서 자리하고 있다. 갑룡 좌상 옆과 앞에 일광탑이 있고 좌상 앞은 약사탑이 있으며, 암바위 옆으로 월광탑이 있다. 일월은 이 사바세계의 세월을 나타내듯 인간의 세월을 보여준다. 그중  약사탑은 인간의 육체적인 병, 정서의 병 등 병고를 쾌유케 하기 위함이다.

탑군은 우주의 축소판이며, 인간의 삶의 현장이라 하셨다고 한다. 묘법연화경 15품에 나오는 연화의 세계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다. 항상 백두루마기를 걸치고 백의민족의 얼을 배움의 터전으로 삶을 살았다고 한다.

95세 때 일이다. 갑룡은 아무 말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자 후손들은 관을 짜고 초상을 치르는데 36시간(하루 반) 만에 다시 일어나시며 죽음을 잘못 정했다고 하여 다시 살아 나셨다가 97세 때부터 단식에 들어가 일 년 동안 용궁의 물만을 마시며 몸속의 이 세상의 사물의 이치를 씻어내고 있었다.

아들은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기를 원했지만 갑룡은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모든 때를 씻고 몸속에 똥오줌을 완전히 제거해서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이 세상과 하직 하고 싶고 내 몸이 정화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 수도한 내가 조상을 찾아 갈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용두봉 산위에 자리를 정하시고 98세로 눈을 감으셨다.

묘자리가 완전히 바위로 된 산을 어떻게 파고 묻을까 걱정하면서 후손들은 정상에 올라가서 그곳을 파보니 진찰흙이 깊이도 나왔다고 한다.

그곳에 잠든 갑룡은 ‘지나가는 너희를 돌봐주고 행인을 돌봐 주겠노라’고 했다. 가파른 정상 위에 자리한 묘소는 산을 3고개를 넘어야 오를 수 있다. 멀리서 보고프면 암마이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내려다보면 이갑룡의 묘소가 보인다.

오로지 인간의 구제와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하고자 기원과 기도로 일관 하시다 가신 갑룡은 30여 년의 축조탑과 신서만을 남기고 1957년 1월 9일에 몸을 보내고 탑사 모든 곳에 갑룡의 혼이 숨을 쉬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격려와 축원으로 인도하면서 계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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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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