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개암사 > 전라북도 Jeollabuk-do, 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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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개암사

063-581-0080

FAX : 063-584-9538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개암로 248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714 개암사

248, Gaeam-ro, Sangseo-myeon, Buan-gun, Jeollabuk-do

전통사찰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24교구 선운사 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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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입니다. 634년(무왕 35) 백제의 왕사(王師)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입니다. 사찰의 이름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배경은 뒷산 정상의 웅장한 우금바위(또는 우금암) 전설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한의 효왕(孝王) 28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사를 보내어 감독하게 하고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우금바위에 천연석굴이 있어 그 바위를 개암이라 불렀는데, 바위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크게 둘로 이루어진 듯하여 '바위가 열린 상태'라는 의미의 개암(開巖)이라 칭했다는 구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이 개암사 창건에 대한 역사 기록도 조선 후기에 편찬된 사적기(寺蹟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적기는 1658년 金波堂 如如스님이 엮은 개암사중건사적기(開巖寺重建寺蹟記)와 1640년 월파자(月坡子) 최경(崔勁)이 지은 법당중창기문(法堂重創記文), 1941년 주봉당(舟峰堂) 상의(尙毅) 스님이 편찬한 개암사중건연혁기(開巖寺重建沿革記) 등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먼저 법당중창기문의「별기(別記)」에 인용된 원효방상량문(元曉房上樑文)에는 백제와 관련된 이 지역의 역사적 위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백제 멸망 직후 묘련의 제자 도침(道琛)이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과 더불어 이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고, 개암사는 원효방(元曉房)의 본사로서 백제부흥운동 당시 구심축을 이룬 장소입니다.

즉 634년 묘련이 처음 설립한 후 676년에 원효ㆍ의상 스님이 우금암(禹金巖) 아래에 있는 우금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수했는데, 이 우금굴은 이후 원효방이라 불리면서 조선 시대 후기까지 개암사의 산내 암자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원효스님의 자취를 지닌 원효방은 이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에도 등장하였으며, 7세기 중엽에 존재했다면 당시부터 개암사의 부속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개암사의 부속암자인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서 참선 득도한 기록이 있습니다.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쪽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쪽에는 팔상전(八相殿), 서쪽에는 응진당(應眞堂)과 명부전(冥府殿)을 지었으며, 총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 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고,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1414년(태종 14) 폐허가 된 것을 선탄(禪坦)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습니다.

그 뒤 1636년(인조 14) 계호(戒浩)가, 1658년 밀영(密英)과 혜징(慧澄)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법천(法天)·찬견(贊堅)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 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을 중건하였습니다. 1737년 시왕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783년 승담(勝潭)이 중수하였습니다.

1913년 화은(華隱)이 선당(禪堂)을 짓고, 1960년 대웅보전을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1993년 응향각을 복원하였고, 이듬해 일주문을 짓고 응진전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인등전·응향각·응진전·일주문과 월성대 및 요사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입니다. 예전의 황금전이 바로 지금의 대웅보전입니다.

이 절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괴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진표율사, 원감국사 등 고승대덕이 인연을 맺었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찰로 절이 자리 잡고 있는 변산은 우리나라의 8승지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개암사는 특히 절의 배경이 되는 우금암이 백제부흥 운동의 근원지로 삼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전설을 지니고 있으며 백제무왕 16년(676)년에 원효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와 머물면서 다시 고려시대에 송광사 출신의 원감국사가 절을 중창하여 황금전 청련각 백옥교 청혀루 금지등 화려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고려 말 조선 초를 거치면서 서해안에 왜구들로 인하여 다시 폐허가 되었던 개암사는 조선태종14년 1414년에 주지 선탄스님에 인하여 다시 중수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개암사는 다시 폐허가 되었으며 인조 15년 1636년 계호대사 대법당을 중건한 후 약 370년에 걸쳐 절 안의 많은 건물과 주변 암자의 대 가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중창된 전각 중 현존하는 것은 대웅보전뿐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1990년부터 현재 회주이신 혜오스님의 원력으로 전각의 중건으로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현 주지 무등스님은 개암사와 불교문화의 부흥을 소원하시며 기도 정진 중입니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개암사] 휴식형 프로그램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진표율사, 원감국사등의 고승대덕이 인연을 맺었던 오랜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천년고찰 개암사입니다.
조용하고 안온한 개암사에서 편안하게 기도하고 산행을 해보세요.
상기일정은 코로나19로 인하여 차담등 일정이 변경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박 ~ 2박 기간의 예약만 가능합니다.
1박 - 성인 50,000원, 중고생 40,000원, 초등생 40,000원, 미취학 20,000원


현지교통
부안에서 줄포, 곰소, 또는 격포, 내소사행 군내버스를 이용
개암사 진입로 입구에서 하차 / 수시 운행 / 15분소요 (버스 하차후 도보로 30분 정도 소요)

도로안내
서해안 고속도로 → 부안나들목 → 부안읍 → 고창방면 23번 국도 → 9.3km → 개암사 진입로 표지판(우회전) → 2.4km → 절 입구
서해안 고속도로 → 줄포 나들목 → 줄포 방면 710번 지방도 → 보안면 방향 23번 국도 → 상서면 → 개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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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보물 제292호

백제무왕 35년(634)에 묘련(妙蓮)스님이 처음 지은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4년(1636)에 계호(戒浩)스님이 다시 지었다. 앞면 3칸 옆면 3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우람한 기둥 덕에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조각기법에서도 세련미가 있는 건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물이다.
불단에는 석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상부에는 닫집을 설치했다. 그 속에는 세 마리의 번용(飜龍)이 또아리를 틀고 매달려 있으며 공중에는 구름과 여의주를 장식하였다. 이처럼 이 건물은 안팎을 연꽃, 용, 봉황 등 불교적 상징물로 가득 장식하여 부처님이 주재하는 불국토를 상징하고 있다.



 


영산회 괘불탱
보물 제1269호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괘불에서 많이 그려지는 영산회상도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길이 14m, 폭 9m의 이 괘불은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이 서 있고 뒷쪽에는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있으며, 앉아 있는 2구의 작은 불상도 보인다. 석가는 머리끝에서 다섯 줄기의 빛이 나며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서 있는 모습이다. 각 상들의 얼굴 형태와 어깨는 각지게 표현하여 경직되어 보이며, 눈썹은 처지게 처리했고 선은 매우 정밀하고 세련되어 강한 인상을 준다. 채색은 주로 붉은색과 녹색에 금색을 사용하였고 군청색을 넣어 색채 대비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영조 25년(1749) 승려화가 의겸이 참여한 그림으로 화면을 꽉 채운 구도와 경직된 형태, 강렬한 색채 등으로 18세기 중엽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며, 제작연대도 확실하여 우리나라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암사 괘불탱의 밑그림도 남아 있는데, 현재 밝혀진 유일한 것으로 당시 괘불화의 제작과정과 필치 등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석조지장보살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

이 불상은 고려시대의 석조지장보살좌상으로 원래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서운마을의 청림사지에 전해오던 것을 개암사로 옮겨 봉안하고 있다. 연꽃을 새긴 받침들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은 어깨와 등부분까지 길게 늘어져있으며, 손은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갠 뒤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곧게 펴 맞대고 있다. 손안에는 보주를 감싸고 있다. 자연석을 받침대로 하고 그 위에 아래로 향한 연꽃잎을 조각한 8각형의 대좌를 올려 놓았다.



 


동종
전라북도 문화재 제126호

이 종은 숙종 15년(1689)에 제작된 조선시대 후기의 범종으로, 전체 높이 89.0㎝, 입 지름 61.5㎝이다. 종의 윗부분에는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다. 어깨부위에는 사각형으로 띠를 둘렀으며, 그 안에 다시 원을 그리고 범자를 새겨 넣었다. 일부는 이 사각형의 구획안에 2행의 한자 명문을 양각하였다.
어깨 아래쪽으로는 4각형 모양의 유곽과 보살입상이 4개씩 교차로 배치되어 있다. 유곽 테두리 안쪽으로 9개의 꽃무늬를 한 유두가 있다. 보살입상은 구름위에 천의를 입고 두 손을 모아 꽃을 받들고 있다. 종 입구는 어깨부위와는 다르게 띠를 두르고 꽃무늬를 새겼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숙종 15년(1689)에 주조했다는 명문이 있어서,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6나한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불교의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열 여섯분을 조각한 이 불상은, 조선 숙종 3년(1677)에 조성한 것으로,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봉안하였으며, 그 좌우로 금강경, 새끼호랑이, 염주, 경전 등을 들고 다양한 자세를 취한 나한들을 배치하였다. 나한들은 각이 진턱에 넓적한 머리의 모습 등 강인한 인상을 준다. 나한의 크기는 대략 92cm에서 98cm사이 이다. 옷은 최근에 색칠을 다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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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황사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
  • 석종사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길 271-56
  • 금산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 관음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산록북로 660